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준나 덴노 (문단 편집) == 생애 == 후지와라노 타비코(藤原旅子)의 소생으로 원래는 서자이기 때문에 황위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810년에 일어난 '''구스코의 변''' 때문이었다. [[헤이제이 덴노]]가 동생 [[사가 덴노]]에게 양위하자 그동안 헤이제이 덴노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던 후지와라노 구스코(藤原薬子)와 그의 오빠 나카나리(藤原仲成)가 다시 한 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변란을 일으켰다. 구스코 등은 사가 덴노의 폐위, 헤이제이 상황의 복위와 헤이조쿄 천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결국 나카나리는 처형되었고 구스코는 자결했다. 이 정변으로 당시 황태자였던 헤이제이 상황의 황자인 다카오카 친왕을 대신해 오오토모 친왕이 황태제가 되었다. 이때 오오토모 친왕은 형 사가 덴노에게 자신의 신분을 황족에서 신하로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가 덴노는 받아들이지 않고 배다른 동생인 오오토모 친왕을 황태제로 삼았다고 한다. 823년 건강이 악화된 사가 덴노는 오오토모 친왕에게 양위했다. 이로써 오오토모 친왕은 37세의 나이에 준나 덴노로 즉위했고, 그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타비코는 황태후로 추존되었다. 준나 덴노는 성격이 온화하여 배다른 형인 사가 상황과도 원만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황태자로 사가 상황의 황자인 마사라 친왕을 세웠고, 보위에 오른 후에 자신의 이름인 오오토모와 오오토모씨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오토모씨를 도모씨로 바꾸었다. 율령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준나 덴노는 지방행정을 감찰하는 가게유시(감해유사)를 다시 설치하여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수도 헤이안쿄의 치안 유지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게비이시(검비위사)를 정비했다. 그리고 친왕임국과 칙지전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정을 강화했다. 한편, 그는 《경국집》(經國集)(827년)을 비롯하여 백과사전인 《비부략》(秘府略)(831년), 《영의해》(令義解)(833년) 같은 시문집과 법전을 편찬하는 등 문화 정책에도 힘썼다. 시문을 좋아했던 그는 《능운집》(凌雲集)과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등을 남겼다. 준나 덴노는 황태제 시절에 지냈던 서원(西院)을 새롭게 정비한 준나인(淳和院)에서 지냈다[* 여기서 별호인 '사이인노미카도'(西院帝)가 유래했다.]. 그리고 그해 3월에 [[닌묘 덴노]]에게 양위했는데, 이때 준나 덴노는 상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과 상황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이 둘이나 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사가 상황을 '선태상천황', 자신은 '후태상천황'으로 불렀다. 그는 양위 7년 뒤인 840년에 55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유골은 유언에 따라 산릉은 만들지 않고 교토에 있는 오하라의 산중에 뿌렸다. 준나 덴노의 아들인 [[츠네사다 친왕|츠네사다 황태자]]는 황위 계승권이 [[무효]]가 되었고, 이후 황위는 사가 덴노의 자손들이 계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